2025

녹턴의 광선

이진실 / 미술비평가


이 전시는 ‘어둠’에 대한 것이다. 《어둠이 오면 내가 찾아가리라》, 전시 제목부터 그렇지 않은가. 이 문장은 누군가에게 하는 약속이다. 어둠 속에 있는 그를 부르고 웅크린 그에게 손을 내미는 다정한 약속이다. 이 약속은 굳건하고 믿음직스럽게 들릴 수 있다. 아니면 공허하고 슬프게 들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중요한 건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에로 여정을 약속하기에 이 어둠은, 이 밤은 실로 떨리고 암담한 시간이다. 그 떨림, 공포, 무력감, 외로움을 뚫고 어딘가로 보내는 어떤 응시, 그것이 유자와 정연1 둘의 공통된 조망점이자 이 전시의 출발점일 것이다.

밤의 정서는 유자의 사진에 붙은 제목(<밤 문자Night Writing>)에도, 정연의 2채널 영상 제목(<나이트 피스Night Piece>)에도 면면이 흐른다. 커다랗게 윈도에 걸린 사진 <밤 문자 Night Writing>(2024)에는 손 휘파람을 부는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밤 문자’는 점자의 발명에 기여했다는 샤를 바비에르가 군사 작전으로 고안해 낸 암호용 문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열두 개의 점으로 구성된 이 문자는 어두운 밤 전장에서 소리 없는 메시지를 가능케 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는 이처럼 어둠 속에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이 가능성 위에서 탄생했다. ‘나이트 피스’는 중세 문학에서 우연하고 기이한 사건, 사고를 다루는 이야기 장르를 일컫는다고 한다. 주로 ‘고딕물’, 또는 ‘고딕 소설’로 분류되는 ‘나이트 피스’는 밤에 일어나는 미스테리한 사건, 미지의 공포가 주를 이루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항상 어둠이 불러일으키는 불안, 환영에 사로잡히는 외로운 이들을 동반한다.2 어둠 속에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타전하는 일, 또는 누군가의 출몰을 기다리며 어둠을 응시하는 일은 멀리 있는 연인, 잠복해 있는 동지,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오래된 멜랑콜리의 형상이다.

유자와 정연에 따르면,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감각을 은유한다. “미세하게 퍼지는 진동으로서 종말, 치명적이지만 동시에 연약한 동작으로 우리를 감싸는 종말적 감각”3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어떤 풍경을 자아낸다. 성급히 단언하자면, 그것은 상실과 상처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소녀들의 어둑한 풍경이다. 기실 밤 혹은 어둠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 포지티브한 것이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둠이라는 실체는 없다. 어둠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상태가 아니라 빛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둠은 그저 컴컴한 것이 아니라 빛을 잃어버린 것이고, 종말은 그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잃어버린 것이다. 음화된(negative) 미래, 꿈보다 기억으로 바랜 듯한 미래에서 떨리듯 새어 나오는 종말의 감각은 다름 아닌 상실의 감각이다.

한편 유자의 사진과 정연의 영상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마치 낮과 밤이라는 두 조각을 이어 붙인 것 같기도 하다. 낮과 밤이라는 각기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피사체를 찍었지만 똑같이 그 너머의 비가시성을 담아내고자 한 ‘빛 그림’처럼 보인다. ‘사진(photograph)’이라는 말 자체가 ‘빛(phos)으로 그린 그림(graphê)’이라는 사실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연의 영상도 감시용 CCTV 카메라나 한밤의 야간 투시 등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광학적(optical) 시선을 의식한다. 유자의 사진들은 쇼윈도가 있는 전시장 1층에 대개 자리했고, <나이트 피스(Night Piece)>를 제외한 정연의 영상은 지하에서 돌아간다. 유자의 카메라는 밝은 대낮 눈부시는 빛 속에 포말처럼 흩어지는 장면을 사진으로 붙들어 놓았고, 정연의 카메라는 어두운 밤 바깥을 쏘다니거나 동굴 속에 웅크린 ‘짐승’ 같은 소녀들의 응시와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러나 이 둘의 작업이 작위적으로도, 대립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은 둘 다 모두 ‘어둠’ 속에서 ‘빛’을 보려는 어떤 열망을 불러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열망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나아가 사진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는 사람이나 환하게 웃는 어린아이와 같은 피사체가 등장하거나 카메라가 포착한 얼굴이나 제스처에 보는 이가 반사적으로 반응 또는 이입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분명 어떤 비참함을 찍은 사진도 그 자체로 감정을 발산하지는 않는다. 나는 한 사진을 두고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을 들먹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 개념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부니 어쩌니 하더라도 사진의 매끈한 표면 위에서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해석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푼크툼을 옹호하자면 그것은 오히려 해석이 불가능한 지점에서 떠오르는 기억의 파열이자 감정의 뚫림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진에는 감정이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감정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느낌의 구조’이고 감상성이 아니라 무감각한 열망이다. 사진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그 사진이 담아낸 순간 빛이 일으키는 고요한 동요 같은 것이다. 이 동요는 빛 그 자체가 아니라 빛이 내려앉은 눈동자에, 이마에, 손가락 끝에, 목덜미에 일어나는 미세한 진동으로 새겨진다(고 믿는다). 우리는 어떤 사진 앞에서 그런 진동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을 때가 있다.

전시장 측면 윈도에 걸린 <Will o’the wisp>(2023)에는 뿌연 창 너머로 도열한 빈 책상들이 비치고, 전시와 동명인 <어둠이 오면 내가 찾아가리라>(2024)에는 어둠을 씻어낸 것 같은 새하얀 윤곽을 이루는 빛이 솜털마냥 부유한다. 의도치 않게 타버린 필름으로 현상된 사진 <종을 울리고 우리는 걷는다>(2022)에는 심연처럼 짙푸른 청색의 하늘 위로 단풍잎과 반딧불이가 산란한 빛무덤처럼 떠오른다. 유자의 사진에는 기록되지는 못했지만 분명 존재했던 것들의 자국이 있다. 이렇게 빛에 잠기거나 어둠에 잠긴 자국은 무력하고도 슬프지만 시리도록 눈부시다. 여기에다 바르트를 인용하기는 싫지만,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한 그의 표현을 덧붙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진은 사라져 버린 존재를 찍었던 “바로 그날에 발산되는 광선의 보고”이며, 사진의 생명력은 “덧붙여진 빛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광선을 통해서” 우리에게 접속된다.4

유자와 정연이 찍은 장면들에는 유난히 흰옷이, 또 흰옷을 입은 소녀가 있다. 굳이 옷 색깔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카메라에 담긴 흰 빛은 카톨릭 미사 속 진지하고도 순수한 어린 복사(福士, Acolythus)를 떠올리게 되는 한편, 정반대로 냉담하고 비현실적인 유령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특히 정연의 영상 <미노타우루스는 미궁에 떨어진 첫 번째 아이였다.>에는 눈이 크고 무표정한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지하 도로, 노래방, 도시의 거리를 헤매는 여자아이를 지켜보다 보면, 저 아이의 출처에 대한 호기심보다 공간과 대비되는 왜소한 아이의 신체에 집중하게 된다. 소음이 가득한 곳이든, 외로운 발자국 소리만 울리는 통로이든 하나같이 아이에겐 텅 빈 구조의 내부로서 ‘미궁’이다. 무감각하게 떠도는 표정, 출구 없음을 감지하면서도 배회하는 야생동물 같은 느린 보폭. 영상은 CCTV 카메라의 시점이나 야간 투시를 이용해 아이를 느리게 따라붙는다. 아이의 눈이 카메라와 마주칠 때 번뜩이는 적광은 동물적인 동시에 다분히 유령적이다.

죽은 자는 빛으로 부유하지만, 산 자는 썩어있는 시체처럼 웅크리고 있다. 고딕물의 서스펜스 분위기가 좁고 어두운 도시의 자취방으로 압축되는 듯한 《세멜레의 빛》은 이렇게 산 자들에게 남겨진 폐쇄와 고립의 감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연인 제우스의 빛을 보는 순간 재가 되어 타버렸다는 세멜레의 이야기가 외상후증후군(PTSD)을 겪으며 침대에 틀어박힌 채 스크린의 빛에 중독된 동시대 소녀의 형상으로 번안된다. 타인의 죽음은 관음의 대상인 동시에 지독한 트라우마이자 결코 똑바로 마주하기 힘든 고통으로 저 바깥에 있다. 동시에 가슴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하지만 어둠 속에 모로 누운 그녀의 얼굴 가득히 스크린의 점멸하는 빛이 퍼질 때, 우리는 그녀의 표정에서 호기심이 아닌 어떤 각오를 발견한다. “타오르는 고통 한가운데서 세멜레는 단 한 순간도 눈을 감지 않는다”5

나는 둘의 작업을 다소 억지스럽게 상실이라는 정서에 연결시키고 있다. 하물며 나는 유자의 사진과 정연의 영상이 어떤 정서의 빛을 발하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것은 어둠이 도래하고 있는 녹턴의 정서이며, 어스름한 떨림의 광선이라고 말이다. 이 억지는 전시의 서문에서 이들이 인용하는 T.S. 엘리엇의 시구(“세상의 종말은 이렇게 다가온다. 쾅 소리가 아닌 흐느낌으로”)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행성 충돌이나 대재앙과 같은 스펙터클한 종말의 정경이 아니라 썩어가는, 삭아가는, 짓물러가는 어떤 종말을 떠올린다. 쾅 소리 없이, 바람 빠지듯이, 얼음이 녹듯이 불안한 노이즈와 간헐적인 진동으로 진행되는 종말 말이다. 이제 우리(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말아주기를...)에게 “종말이 다가온다”, “세계가 끝나버렸다”는 거창한 선언 따위 필요하지 않다. 무슨 말이냐고? 니체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해보자.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고 있어서 세계가 끝났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다!”6

세계는 이미 끝장났고, 우리는 그 끝난 세계를 ‘그냥’ 부록처럼 살고 있다는 감각이 이명처럼 삐---하고 타전된다. 종말은 일상이 되었다. 이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는 십일 년 전 한 번 침몰했고 삼 년 전 다시 질식사했다. 그 사이에 무람없이 곁에 있는 줄 알았던 작은 세계들이 무너지고 또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다들 친구의 기일을 지니고 있다. 삶과 죽음의 반복은 유명한 철학자들의 아포리아가 아니라 그냥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종소리 같은 것이 되었다. 그저 연착된 기차의 안내 방송 같은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썩어가는 종말을 지켜본다. 종이 울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기어이 다시 한번 눈을 뜬다. 날짜를 센다. 바르트가 말했듯, 날짜는 사진에 속하는데, 그것은 “머리를 쳐들고 삶과 죽음, 세대들의 냉혹한 소멸을 헤아리게 하기 때문이다.”7


김유자 작가와 박정연 작가다. 나는 이들의 작업을 지켜봐 오면서 비평가 대 작가로서의 거리감을 상당히 잃었고 이 글에 있어서 그 거리감 상실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서 이들을 이름으로만 지칭할 것이다.
‘고스로리’ 풍의 옷을 입고 다니는 정연은 지독한 고딕 소설 마니아다.
3 박정연, 《어둠이 오면 내가 찾아가리라》 전시 서문에서.
4 인용문은 모두 롤랑 바르트, 『밝은 방-사진에 관한 노트』, 김웅권 역, 동문선, 2006, 104쪽.
5 박정연, <세멜레의 빛>에 등장하는 텍스트 중에서.
6 원문은 다음과 같다.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0, 16쪽.
7 바르트, 『밝은 방』, 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