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콜론처럼 동등하고 느슨하게 — 김유자의 <시스터 시티 : 지도의 바깥>
구름을 먼저 보았을까. 돌을 먼저 보았을까. 동그란 모양새가 서로 닮은 구름과 돌에 눈길이 가는 사진을 바라보며 사진가는 무엇을 먼저 발견했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다 무엇과 무엇이 함께 있을 때, 나는 왜 언제나 어느 것이 먼저인지 가늠하려는 습관이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이 더 먼저인지에서 그치지 않고, 무엇이 더 크고 무거운지, 무엇이 더 예쁘고 아름다운지, 무엇이 더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서로를 견주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그 어떤 사물이나 풍경이든, 그 어떤 느낌이나 김정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간에.
‘구름을 닮은 돌’이라고 쓰려다가 ‘돌을 닮은 구름’이라고 고쳐 쓰는 데에도 그 나쁜 습관이 깔려 있다. 구름은 기껏 10분 정도 형태를 유지했다가 사라지니까, 돌은 구름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킬 테니까, ‘돌을 닮은 구름’이 더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진 속의 저 장소에 간다면 돌과 시멘트, 하늘과 바다는 그대로 있어도 구름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구름을 닮은 돌’은 과분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진의 제목은 ‘:(Colon)’, 즉 문장부호 콜론이다. 제목은 시각적으로 서로 형태가 닮은 구름과 돌이 우연히 위아래로 마주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다. 또한 개념적으로 서로 다른 대상들을 대등하게 연결하거나 나열할 때 사용하는 콜론의 기능을 가져온다. 무엇과 무엇이 함께할 때 다른 한쪽을 종속적으로 연결하는 문장부호 대시나 세미콜론과 달리 콜론은 두 대상을 위계 없이 연결한다. 그렇다면 구름과 돌, 두 대상의 속성이나 성질을 기준으로 어느 한 대상을 우선시하거나 우위에 두는 나의 시선은 이 사진을 바라볼 때 미끄러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콜론의 존재를 의식하며 다시 사진을 바라본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과 그 자리에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사이에도 위계가 없다고 의식적으로 ‘구름 : 돌’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사진 속의 모든 것을 애써 ‘대등하게’ 바라본다. 구름 : 돌 : 시멘트 : 하늘 : 바다 : 빛 : 그림자 : 공기⋯⋯.
그런 식으로 ‘구름 : 돌’ 사진이 포함된 사진 작업 <시스터 시티 : 지도의 바깥> (2022~)을 살피면, 작가 김유자는 궁극적으로 위계 없이 ‘보기’와 ‘걷기’를 시도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작업은 한국의 대전과 대만의 가오슝, 두 도시에서 촬영한 정물과 풍경들 그리고 대전에서 살았던 이들의 초상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에게 무척 낯선 도시인 대전과 가오슝을 지도 없이 걸으며 이미지를 수집했다. 보통 우리는 원하는 목적지를 찾기 위해 그리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습관적으로 지도를 본다. 그리고 지도를 통해 지역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지도는 영토와 국경, 면적과 인구, 도로와 교통, 건물과 주택 등 각 정보의 중요도와 가치를 구분해 표기한다. 만약 우리가 낯선 도시에서 관광지도를 펼친다면. 그 안에서 더 크고 진하게 표기된 지명을, 즉 평소 대중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에 자연스레 눈길을 빼앗길 것이다. 그러면 아무래도 지도가 강조해준 장소를 중심으로 동선을 짤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기호들과 정보들의 레이어로 체계화된 지도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것은 랜드마크나 명소와 같은 장소의 위계 구조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는 물론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겠지만, 출발부터 지도를 펴고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무작위의 ‘걷기’는 한편으론 능동적으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애초에 작가가 가오슝을 선택한 것도 장소와 관련된 이유나 뚜렷한 목적이 있기 보다는 이곳이 대전과 결연한 우호협력도시*라는 약한 연결고리 때문이다. 더 앞서 작가가 대전을 촬영 장소로 정한 것은 특이하게도 자신에게 연고도 없고 뚜렷한 특색이 인식되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작가에게 기억이 남는 곳 중의 하나는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라스베이거스 공원’이다. 작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등하굣길에 이 공원을 수시로 지나갔지만, 왜 이름이 ‘라스베이거스’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름과 같은 장소적 특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공원이 안산과 라스베이거스의 자매도시 결연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성인이 된 이후에야 우연히 알게 된다.
안산과 라스베이거스, 대전과 가오슝, 동떨어진 두 도시가 자매도시, 우호도시로 결연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 또는 행정적 목적과 필요, 홍보 효과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모른다면 안산에 위치한 라스베이거스 공원의 존재는 무척 생뚱맞고, 그 명명 또한 뜬금없다. 하지만 오히려 작가에게는 서로 긴밀하지 않은 이 헐거운 방식의 결연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상호를 구속하지 않고, 서로 의무와 책임에서 자유로운 관계는 어떤 식으로도 변화할 잠재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느슨한 연대를 통해 안산에는 라스베이거스 공원이 생겨나고, 라스베이거스에 안산자매공원이 생기면서 두 도시는 서로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된다.
‘안산 : 라스베이거스’의 기억은 이제 ‘대전 : 가오슝’의 여행으로까지 이어진다. 지도 없이 펼쳐지는 이 여정에서 김유자가 바라보는 것은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을 장면들이다. 깍지를 낀 두 손과 손가락 사이에 아른거리는 빛, 공중에서 흩어지는 물방울 사이로 나타나는 무지개, 물 위로 지나가는 철제 난간과 바닥에 살랑거리는 햇볕과 그늘, 대낮에 랜턴을 들고 희미한 불빛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누군가의 뒷모습, 작고 동그란 형태가 돌과 잠시 싱크된 뒤 사라졌을 구름⋯⋯. 사진 속에 등장하는 그 모든 것은 지도에 나타나는 선명한 기호가 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연약한 빛의 기울기처럼 분명하게 고정되지 않고,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간들이다. 작가는 우연히 만난 그 모든 존재와 시간을 애써 바라본다. 그렇게 바라보지 않으면 흔적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어떤 선후와 인과, 위계도 없이 다만 눈동자와 발걸음을 분주히 움직인다. 손, 빛, 물방울, 무지개, 물, 철제 난간, 그늘, 랜턴, 뒷모습, 돌, 구름⋯⋯. 작가는 걸으면서 우연히 만난 것들, 애써 바라본 것들 그사이마다 콜론을 기입한다. 그건 정보순으로 기재된 지도에서 벗어나 내가 직접 겪을 장소를 새롭게 걸어가는 과정이자, 가치순으로 분별하는 시점에서 벗어나 내가 마주할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이다. 그 과정과 시간을 동행한 카메라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시공간의 한 장면을 기록한다. 그리고 사진은 이미 사라진 그때 한순간을 기억한다. 인간의 기준에서 벗어나 지도를 우주까지 확장하고, 시점을 자연까지 연장하면 먼저도 나중도 없고, 원인도 결과도 없다. 모두가 공평하게 잠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질 뿐. 무엇과 무엇의 선후와 인과, 위계 없이 맨눈으로 바라보면 그저 ‘함께’라는 모양새만 도드라진다. 잠시라도 함께 같은 시공간을 머물렀던, 특별한 우연이 유독 반짝거린다.
‘셀프 돌봄’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면서 골몰했던 것은, 말하자면 선후, 인과, 위계의 관계였다. 타인을 온전히 돌보려면 나 자신부터 먼저 돌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보다 시급하게 돌봄이 필요한 타인이 있다면 어떡하나? 어쩌면 개인적인 측면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돌봄의 방식과 비용에 관한 합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동물보다는 인간에게 돌봄의 손길을 먼저 뻗어야 하 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무엇을 돌봄으로써 필연적으로 무엇이 소외될 수밖에 없다.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 인간과 동물 그 누구도 소외받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다는 상상이나 전제가 불가능하다면, 돌봄은 또 하나의 특권이 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특권은 투쟁을 불러오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가른다. 무엇이 무엇에게 종속되지 않고, 무엇이 무엇을 소외시키지 않는, 콜론처럼 동등하고도 느슨한 연대를 닮은 ‘돌봄’을 처음 상상해본다.
*시민의 문화 교류나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도시 관계의 개념 중 하나로, 두 도시의 관계가 더 긴밀해지면 ‘자매도시’로 승격할 수 있다.
박지수 / 보스토크 편집장, 『Axt』 54호 셀프 돌봄
구름을 먼저 보았을까. 돌을 먼저 보았을까. 동그란 모양새가 서로 닮은 구름과 돌에 눈길이 가는 사진을 바라보며 사진가는 무엇을 먼저 발견했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다 무엇과 무엇이 함께 있을 때, 나는 왜 언제나 어느 것이 먼저인지 가늠하려는 습관이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이 더 먼저인지에서 그치지 않고, 무엇이 더 크고 무거운지, 무엇이 더 예쁘고 아름다운지, 무엇이 더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서로를 견주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그 어떤 사물이나 풍경이든, 그 어떤 느낌이나 김정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간에.
‘구름을 닮은 돌’이라고 쓰려다가 ‘돌을 닮은 구름’이라고 고쳐 쓰는 데에도 그 나쁜 습관이 깔려 있다. 구름은 기껏 10분 정도 형태를 유지했다가 사라지니까, 돌은 구름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킬 테니까, ‘돌을 닮은 구름’이 더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진 속의 저 장소에 간다면 돌과 시멘트, 하늘과 바다는 그대로 있어도 구름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구름을 닮은 돌’은 과분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진의 제목은 ‘:(Colon)’, 즉 문장부호 콜론이다. 제목은 시각적으로 서로 형태가 닮은 구름과 돌이 우연히 위아래로 마주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다. 또한 개념적으로 서로 다른 대상들을 대등하게 연결하거나 나열할 때 사용하는 콜론의 기능을 가져온다. 무엇과 무엇이 함께할 때 다른 한쪽을 종속적으로 연결하는 문장부호 대시나 세미콜론과 달리 콜론은 두 대상을 위계 없이 연결한다. 그렇다면 구름과 돌, 두 대상의 속성이나 성질을 기준으로 어느 한 대상을 우선시하거나 우위에 두는 나의 시선은 이 사진을 바라볼 때 미끄러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콜론의 존재를 의식하며 다시 사진을 바라본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과 그 자리에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사이에도 위계가 없다고 의식적으로 ‘구름 : 돌’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사진 속의 모든 것을 애써 ‘대등하게’ 바라본다. 구름 : 돌 : 시멘트 : 하늘 : 바다 : 빛 : 그림자 : 공기⋯⋯.
그런 식으로 ‘구름 : 돌’ 사진이 포함된 사진 작업 <시스터 시티 : 지도의 바깥> (2022~)을 살피면, 작가 김유자는 궁극적으로 위계 없이 ‘보기’와 ‘걷기’를 시도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작업은 한국의 대전과 대만의 가오슝, 두 도시에서 촬영한 정물과 풍경들 그리고 대전에서 살았던 이들의 초상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에게 무척 낯선 도시인 대전과 가오슝을 지도 없이 걸으며 이미지를 수집했다. 보통 우리는 원하는 목적지를 찾기 위해 그리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습관적으로 지도를 본다. 그리고 지도를 통해 지역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지도는 영토와 국경, 면적과 인구, 도로와 교통, 건물과 주택 등 각 정보의 중요도와 가치를 구분해 표기한다. 만약 우리가 낯선 도시에서 관광지도를 펼친다면. 그 안에서 더 크고 진하게 표기된 지명을, 즉 평소 대중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에 자연스레 눈길을 빼앗길 것이다. 그러면 아무래도 지도가 강조해준 장소를 중심으로 동선을 짤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기호들과 정보들의 레이어로 체계화된 지도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것은 랜드마크나 명소와 같은 장소의 위계 구조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는 물론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겠지만, 출발부터 지도를 펴고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무작위의 ‘걷기’는 한편으론 능동적으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애초에 작가가 가오슝을 선택한 것도 장소와 관련된 이유나 뚜렷한 목적이 있기 보다는 이곳이 대전과 결연한 우호협력도시*라는 약한 연결고리 때문이다. 더 앞서 작가가 대전을 촬영 장소로 정한 것은 특이하게도 자신에게 연고도 없고 뚜렷한 특색이 인식되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작가에게 기억이 남는 곳 중의 하나는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라스베이거스 공원’이다. 작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등하굣길에 이 공원을 수시로 지나갔지만, 왜 이름이 ‘라스베이거스’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름과 같은 장소적 특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공원이 안산과 라스베이거스의 자매도시 결연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성인이 된 이후에야 우연히 알게 된다.
안산과 라스베이거스, 대전과 가오슝, 동떨어진 두 도시가 자매도시, 우호도시로 결연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 또는 행정적 목적과 필요, 홍보 효과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모른다면 안산에 위치한 라스베이거스 공원의 존재는 무척 생뚱맞고, 그 명명 또한 뜬금없다. 하지만 오히려 작가에게는 서로 긴밀하지 않은 이 헐거운 방식의 결연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상호를 구속하지 않고, 서로 의무와 책임에서 자유로운 관계는 어떤 식으로도 변화할 잠재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느슨한 연대를 통해 안산에는 라스베이거스 공원이 생겨나고, 라스베이거스에 안산자매공원이 생기면서 두 도시는 서로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된다.
‘안산 : 라스베이거스’의 기억은 이제 ‘대전 : 가오슝’의 여행으로까지 이어진다. 지도 없이 펼쳐지는 이 여정에서 김유자가 바라보는 것은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을 장면들이다. 깍지를 낀 두 손과 손가락 사이에 아른거리는 빛, 공중에서 흩어지는 물방울 사이로 나타나는 무지개, 물 위로 지나가는 철제 난간과 바닥에 살랑거리는 햇볕과 그늘, 대낮에 랜턴을 들고 희미한 불빛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누군가의 뒷모습, 작고 동그란 형태가 돌과 잠시 싱크된 뒤 사라졌을 구름⋯⋯. 사진 속에 등장하는 그 모든 것은 지도에 나타나는 선명한 기호가 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연약한 빛의 기울기처럼 분명하게 고정되지 않고,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간들이다. 작가는 우연히 만난 그 모든 존재와 시간을 애써 바라본다. 그렇게 바라보지 않으면 흔적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어떤 선후와 인과, 위계도 없이 다만 눈동자와 발걸음을 분주히 움직인다. 손, 빛, 물방울, 무지개, 물, 철제 난간, 그늘, 랜턴, 뒷모습, 돌, 구름⋯⋯. 작가는 걸으면서 우연히 만난 것들, 애써 바라본 것들 그사이마다 콜론을 기입한다. 그건 정보순으로 기재된 지도에서 벗어나 내가 직접 겪을 장소를 새롭게 걸어가는 과정이자, 가치순으로 분별하는 시점에서 벗어나 내가 마주할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이다. 그 과정과 시간을 동행한 카메라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시공간의 한 장면을 기록한다. 그리고 사진은 이미 사라진 그때 한순간을 기억한다. 인간의 기준에서 벗어나 지도를 우주까지 확장하고, 시점을 자연까지 연장하면 먼저도 나중도 없고, 원인도 결과도 없다. 모두가 공평하게 잠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질 뿐. 무엇과 무엇의 선후와 인과, 위계 없이 맨눈으로 바라보면 그저 ‘함께’라는 모양새만 도드라진다. 잠시라도 함께 같은 시공간을 머물렀던, 특별한 우연이 유독 반짝거린다.
‘셀프 돌봄’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면서 골몰했던 것은, 말하자면 선후, 인과, 위계의 관계였다. 타인을 온전히 돌보려면 나 자신부터 먼저 돌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보다 시급하게 돌봄이 필요한 타인이 있다면 어떡하나? 어쩌면 개인적인 측면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돌봄의 방식과 비용에 관한 합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동물보다는 인간에게 돌봄의 손길을 먼저 뻗어야 하 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무엇을 돌봄으로써 필연적으로 무엇이 소외될 수밖에 없다.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 인간과 동물 그 누구도 소외받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다는 상상이나 전제가 불가능하다면, 돌봄은 또 하나의 특권이 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특권은 투쟁을 불러오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가른다. 무엇이 무엇에게 종속되지 않고, 무엇이 무엇을 소외시키지 않는, 콜론처럼 동등하고도 느슨한 연대를 닮은 ‘돌봄’을 처음 상상해본다.
*시민의 문화 교류나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도시 관계의 개념 중 하나로, 두 도시의 관계가 더 긴밀해지면 ‘자매도시’로 승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