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언어의 안과 밖을 거니는 사진 (김성우 / 독립 큐레이터,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디렉터)
오늘날의 사진은 그 자체로 현대적 지각 방식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사진의 이미지는 거칠게 말하자면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즉, 사진기에 포착된 이미지는 우리의 망막에 맺히는 대상의 외양과 다름없는 현상이다. 대상이 지닌 표면의 정보값을 그대로 옮겨낸 사진은 과거 재현으로서의 회화의 자리를 탈환했다. 거기에는 실재하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이 존재한다. 그렇게 현상은 고정된 시간과 장소에 결박된 채 인화지 위로 옮겨진다. 사각의 프레임으로 크롭된 이미지에서 서사는 사라지고 앞뒤가 잘린 이미지는 그 자체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것들은 고정된 순간의 외적 기록이며, 그 자체로 서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의미를 보존하기보다는, 의미에서 분리된 채 우리가 우리의 망막에 맺힌 상(像)에 부여하는 신뢰성을 그대로 지닌 현상에 그친다. 그렇게 사진은 즉각적인 증언으로서 말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런 사진-이미지가 어느새 정보값 너머, 그 표피의 현상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재현 너머를 논하기 시작한 동시대 미술의 보편적 흐름을 살피더라도 의미에 다가서기 위해 정제된 언어는 이미지-현상과 긴밀히 연동하여 작동하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와 언어의 접면이 다소 느슨한 경우, 그래서 현상으로부터 빗겨 나가고 언어로 규정하기에는 그 의미가 끊임없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김유자의 작업은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한다. 그의 작업은 마치 영화의 한 플롯처럼, 그러니까 앞뒤 시퀀스가 끊겨진 채 존재하는 하나의 장면처럼, 심지어 때로는 장면과 장면의 사이에서 무의미로 의미를 수반하는 맥거핀과도 같아 보인다. 작업의 첫인상만 보아서는 작가 고유의 감상에 기대어선 낭만적이거나 감성적인 사진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피부 위에 잠시 새겨진 옷 주름, 푸른 배경의 상단에 걸쳐 잘린 채 등장한 손끝과 거기에 떨어질 듯 맺힌 물방울, 이슬로 인해 희뿌옇게 눈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드러내는 막과 같은 그의 사진들은 보기 좋은 조형성을 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감수성은 개인적이기에 공감의 차원에서 그의 작업이 절대적으로 관객의 감흥을 끌어내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감성이 아닌 존재를 탐구하는 그의 태도이며, 그의 시선이 가닿는 대상이거나 그 시선의 끝에서 생동하는 모종의 감각이다. 그의 작업은 이렇다 할 언어로 규정하기 이전 상상의 영역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있기에 말이다.
작가는 지난 작업 <Frankie> (2021) 연작에서 원인을 알지만 명료하지 않은, 그래서 물리적인 흔적이나 증거로서는 그 현상을 명쾌하게 증명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장면을 구성하는 존재들을 “빈칸으로서의 존재들”이라 명명한다. 유령과 같이 부재와 여백으로부터 출몰하는 존재들, 그래서 명징한 언어로 규정하거나 정의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대상들이 이들이다. 작가의 이러한 상상은 피부에서 시작하여 신체 감각의 내외부로 연장하는데, 이를테면 자고 일어난 후 몸에 새겨진 자국이나 달라진 사물의 온도에 의해 표면에 맺힌 물방울 등으로 대체되는 식이다. 공기 중의 보이지 않는 수분이 사물의 표면 위에서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혹은 잠시간 피부 위에서 모종의 지난 시간을 증거하는 흔적을 포착한 이미지는 잠시나마 멈춰선 한시적인 현상들이다. 이들은 시각적인 증거이지만, 동시에 촉각적 감각을 환기하며 고정된 이미지에 전환의 정서를 부여한다. 형태는 아스러지고, 존재를 둘러싼 감각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이미지의 고정성은 감흥을 수반한 떨림으로 생동하기 시작하고, 선명한 이미지의 서늘함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드리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우리는 “평범한 장면 안에 가득 찬 움직임”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빈칸(혹은 여백, 또는 유령과 같은 형식)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부터 촉발한 감각적 가능성은 다음의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Cusp>(2021-)에서 김유자는 자동 필름 카메라와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으로 촬영을 진행한다. 그리고 그저 목적 없이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한 이 촬영은 우연한 결과물을 낳는다. 수명이 다해 기능이 떨어진 필름은 대상을 선명하게 기록할 수 없게 만들었고, 작가가 촬영한 대상은 지워진 상태로 현상되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기록 불가능한 사진을 마주한다는 것은 목격했음에도 언어로 담아낼 길 없는, 시각성 너머 보지 못함으로 촉발된 감각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기록 매체인 사진의 오작동에서 비롯되어 물질로 존재하던 것들의 마찰과 충돌에서 발생한 어긋난 시공간의 주름을 펴내어 담아낸 것과 같다. 그때 본 것을 현재, 그러니까 인화된 사진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몸에 익은 감각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의 사진 이미지는 더 이상 현상이 천명하던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거짓 없는 외양의 이미지가 담보하는 신뢰성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사고에 중추가 된 시각성은 끊임없이 현재를 갱신하지만, 오히려 그의 사진은 과거 회상이 담당했던 기억을 환기함으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현재를 생동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이렇듯 끊임없이 새롭게 출몰하는 잔영과 같은 감각은 사진 이미지를 둘러싼 물리적 조건의 변주에서 보다 강화된다. 이를테면, 작가는 때때로 이미지를 투명하고 명징하게 뒷받침하는 일반적인 인화지가 아닌 거친 한지와 같은 종이에 사진을 인화함으로 해상도를 떨어뜨리는 낮추고 오히려 대상에 내재한 감각적 측면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지류의 선택은 마치 재료 고유의 물질성이 곧 조형의 논리이자 언어로 이어지듯, 낱장의 이미지가 선사하는 감흥의 밀도를 배가시킨다. 여기에 더해 그는 사진의 스케일과 그것을 담고 있는 프레임의 변주—프레임이 있거나 혹은 없는, 그리고 때로는 사진의 이미지와 반응하는 프레임 색의 선택 등—, 높낮이나 간격을 달리하는 배열의 구성, 심지어 전시 공간의 물리적 조건에 반응하는 디스플레이 형식을 택함으로 감각의 층위는 더욱 분열, 확장한다. 이런 면에서 김유자의 작업은 하나의 오브젝트화된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구성적이다. 관객은 이렇게 조각난 감각의 편린들을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대상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이는 마치 환유(metonymy)의 원리와도 닮아 있는데 연상과 인접, 이월의 과정에서 대상에 다가설 수 있는 감각적 경로는 더욱 다양해지고, 시각과 언어적 규정이 성취할 수 있는 의미의 한계 이상으로 대상에 대한 선명함을 선사하게 된다.
이미지가 제공하는 사실적인 정보를 언어의 안, 그리고 언어로 붙잡을 수 없는 영역을 언어의 바깥, 즉 감각이라 한다면, 김유자의 사진은 언어의 안과 밖을 거닐며 매우 다성적인 차원에서 대상에게 다가설 수 있는 경로를 제공한다. 작품은 대개 글과 함께 그 의미에 정박한다. 하지만, 김유자의 작업에서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는 비교적 느슨하다. 그렇기에 언어라는 명시적인 체계로 속박한 기호로서의 세계 안을 거니는 동시에 밖으로 향하는 그의 시선에서 그가 사진으로 포착한 이미지는 다층적인 잔상을 획득하게 된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자신의 저서에서 사람, 장소, 사건을 빛과 어둠의 우아한 형태를 통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김유자의 사진들은 추가 설명 없이 현상의 진실에 다가서게 한다. 그가 포착한 장면은 서사를 기다리는 문장이며, 문장을 구성하는 중심에선 단어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대상에 섬세하게 귀를 기울이고, 오래도록 응시한다. 가만히 멈춰 섰던 단어가 마치 살아 숨 쉬는 문장으로, 그리고 서사로 그의 주변을 밝히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이렇듯 김유자는 자기 자신과 그를 둘러싼 삶의 관계들을 깊이 바라보고, 특정 상황이나 환경, 대상을 대하며 느꼈던 고유의 감정과 정서에 귀 기울이며, 사진의 시선에 기대어 시각으로부터 멀어진 새로운 감각을 동원한 상상을 촉발하는 식이다.
다시 돌아와 생각해 보면, 사진의 이미지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었’다. 사진이 무언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시각 언어, 그리고 그것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언어로 온전히 속박할 수 없다. 시각 언어는 기술된 언어(텍스트)의 바깥, 즉 감각의 영역을 수용하며, 이미지와 언어의 끊임없는 연동과 미끄러짐의 과정에서 의미의 지평을 확장하고 수렴한다. 빛에 의해 반사된 대상의 표면적 형상은 그에 대한 언어적 기술과 같이 사진에 선명하게 포착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김유자의 작업은 이러한 외양의 선명함을 의도된 모호함ambiguity 속에 위치시킨다. 그의 작업은 표층의 사실에 귀속되지 않고, 사진 매체로 포착한 이미지를 마치 문장 속의 한 단어처럼 문맥 아래 끊임없이 변화, 갱신, 확장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말한다. 사진의 평면성에는 우리를 다른 감각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힘이 있다고. 한 장의 압축된 이미지를 통해 그가 만들어 낼 문장, 그리고 그다음의 서사가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오늘날의 사진은 그 자체로 현대적 지각 방식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사진의 이미지는 거칠게 말하자면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즉, 사진기에 포착된 이미지는 우리의 망막에 맺히는 대상의 외양과 다름없는 현상이다. 대상이 지닌 표면의 정보값을 그대로 옮겨낸 사진은 과거 재현으로서의 회화의 자리를 탈환했다. 거기에는 실재하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이 존재한다. 그렇게 현상은 고정된 시간과 장소에 결박된 채 인화지 위로 옮겨진다. 사각의 프레임으로 크롭된 이미지에서 서사는 사라지고 앞뒤가 잘린 이미지는 그 자체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것들은 고정된 순간의 외적 기록이며, 그 자체로 서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의미를 보존하기보다는, 의미에서 분리된 채 우리가 우리의 망막에 맺힌 상(像)에 부여하는 신뢰성을 그대로 지닌 현상에 그친다. 그렇게 사진은 즉각적인 증언으로서 말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런 사진-이미지가 어느새 정보값 너머, 그 표피의 현상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재현 너머를 논하기 시작한 동시대 미술의 보편적 흐름을 살피더라도 의미에 다가서기 위해 정제된 언어는 이미지-현상과 긴밀히 연동하여 작동하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와 언어의 접면이 다소 느슨한 경우, 그래서 현상으로부터 빗겨 나가고 언어로 규정하기에는 그 의미가 끊임없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김유자의 작업은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한다. 그의 작업은 마치 영화의 한 플롯처럼, 그러니까 앞뒤 시퀀스가 끊겨진 채 존재하는 하나의 장면처럼, 심지어 때로는 장면과 장면의 사이에서 무의미로 의미를 수반하는 맥거핀과도 같아 보인다. 작업의 첫인상만 보아서는 작가 고유의 감상에 기대어선 낭만적이거나 감성적인 사진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피부 위에 잠시 새겨진 옷 주름, 푸른 배경의 상단에 걸쳐 잘린 채 등장한 손끝과 거기에 떨어질 듯 맺힌 물방울, 이슬로 인해 희뿌옇게 눈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드러내는 막과 같은 그의 사진들은 보기 좋은 조형성을 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감수성은 개인적이기에 공감의 차원에서 그의 작업이 절대적으로 관객의 감흥을 끌어내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감성이 아닌 존재를 탐구하는 그의 태도이며, 그의 시선이 가닿는 대상이거나 그 시선의 끝에서 생동하는 모종의 감각이다. 그의 작업은 이렇다 할 언어로 규정하기 이전 상상의 영역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있기에 말이다.
작가는 지난 작업 <Frankie> (2021) 연작에서 원인을 알지만 명료하지 않은, 그래서 물리적인 흔적이나 증거로서는 그 현상을 명쾌하게 증명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장면을 구성하는 존재들을 “빈칸으로서의 존재들”이라 명명한다. 유령과 같이 부재와 여백으로부터 출몰하는 존재들, 그래서 명징한 언어로 규정하거나 정의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대상들이 이들이다. 작가의 이러한 상상은 피부에서 시작하여 신체 감각의 내외부로 연장하는데, 이를테면 자고 일어난 후 몸에 새겨진 자국이나 달라진 사물의 온도에 의해 표면에 맺힌 물방울 등으로 대체되는 식이다. 공기 중의 보이지 않는 수분이 사물의 표면 위에서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혹은 잠시간 피부 위에서 모종의 지난 시간을 증거하는 흔적을 포착한 이미지는 잠시나마 멈춰선 한시적인 현상들이다. 이들은 시각적인 증거이지만, 동시에 촉각적 감각을 환기하며 고정된 이미지에 전환의 정서를 부여한다. 형태는 아스러지고, 존재를 둘러싼 감각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이미지의 고정성은 감흥을 수반한 떨림으로 생동하기 시작하고, 선명한 이미지의 서늘함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드리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우리는 “평범한 장면 안에 가득 찬 움직임”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빈칸(혹은 여백, 또는 유령과 같은 형식)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부터 촉발한 감각적 가능성은 다음의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Cusp>(2021-)에서 김유자는 자동 필름 카메라와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으로 촬영을 진행한다. 그리고 그저 목적 없이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한 이 촬영은 우연한 결과물을 낳는다. 수명이 다해 기능이 떨어진 필름은 대상을 선명하게 기록할 수 없게 만들었고, 작가가 촬영한 대상은 지워진 상태로 현상되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기록 불가능한 사진을 마주한다는 것은 목격했음에도 언어로 담아낼 길 없는, 시각성 너머 보지 못함으로 촉발된 감각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기록 매체인 사진의 오작동에서 비롯되어 물질로 존재하던 것들의 마찰과 충돌에서 발생한 어긋난 시공간의 주름을 펴내어 담아낸 것과 같다. 그때 본 것을 현재, 그러니까 인화된 사진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몸에 익은 감각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의 사진 이미지는 더 이상 현상이 천명하던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거짓 없는 외양의 이미지가 담보하는 신뢰성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사고에 중추가 된 시각성은 끊임없이 현재를 갱신하지만, 오히려 그의 사진은 과거 회상이 담당했던 기억을 환기함으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현재를 생동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이렇듯 끊임없이 새롭게 출몰하는 잔영과 같은 감각은 사진 이미지를 둘러싼 물리적 조건의 변주에서 보다 강화된다. 이를테면, 작가는 때때로 이미지를 투명하고 명징하게 뒷받침하는 일반적인 인화지가 아닌 거친 한지와 같은 종이에 사진을 인화함으로 해상도를 떨어뜨리는 낮추고 오히려 대상에 내재한 감각적 측면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지류의 선택은 마치 재료 고유의 물질성이 곧 조형의 논리이자 언어로 이어지듯, 낱장의 이미지가 선사하는 감흥의 밀도를 배가시킨다. 여기에 더해 그는 사진의 스케일과 그것을 담고 있는 프레임의 변주—프레임이 있거나 혹은 없는, 그리고 때로는 사진의 이미지와 반응하는 프레임 색의 선택 등—, 높낮이나 간격을 달리하는 배열의 구성, 심지어 전시 공간의 물리적 조건에 반응하는 디스플레이 형식을 택함으로 감각의 층위는 더욱 분열, 확장한다. 이런 면에서 김유자의 작업은 하나의 오브젝트화된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구성적이다. 관객은 이렇게 조각난 감각의 편린들을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대상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이는 마치 환유(metonymy)의 원리와도 닮아 있는데 연상과 인접, 이월의 과정에서 대상에 다가설 수 있는 감각적 경로는 더욱 다양해지고, 시각과 언어적 규정이 성취할 수 있는 의미의 한계 이상으로 대상에 대한 선명함을 선사하게 된다.
이미지가 제공하는 사실적인 정보를 언어의 안, 그리고 언어로 붙잡을 수 없는 영역을 언어의 바깥, 즉 감각이라 한다면, 김유자의 사진은 언어의 안과 밖을 거닐며 매우 다성적인 차원에서 대상에게 다가설 수 있는 경로를 제공한다. 작품은 대개 글과 함께 그 의미에 정박한다. 하지만, 김유자의 작업에서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는 비교적 느슨하다. 그렇기에 언어라는 명시적인 체계로 속박한 기호로서의 세계 안을 거니는 동시에 밖으로 향하는 그의 시선에서 그가 사진으로 포착한 이미지는 다층적인 잔상을 획득하게 된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자신의 저서에서 사람, 장소, 사건을 빛과 어둠의 우아한 형태를 통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김유자의 사진들은 추가 설명 없이 현상의 진실에 다가서게 한다. 그가 포착한 장면은 서사를 기다리는 문장이며, 문장을 구성하는 중심에선 단어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대상에 섬세하게 귀를 기울이고, 오래도록 응시한다. 가만히 멈춰 섰던 단어가 마치 살아 숨 쉬는 문장으로, 그리고 서사로 그의 주변을 밝히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이렇듯 김유자는 자기 자신과 그를 둘러싼 삶의 관계들을 깊이 바라보고, 특정 상황이나 환경, 대상을 대하며 느꼈던 고유의 감정과 정서에 귀 기울이며, 사진의 시선에 기대어 시각으로부터 멀어진 새로운 감각을 동원한 상상을 촉발하는 식이다.
다시 돌아와 생각해 보면, 사진의 이미지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었’다. 사진이 무언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시각 언어, 그리고 그것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언어로 온전히 속박할 수 없다. 시각 언어는 기술된 언어(텍스트)의 바깥, 즉 감각의 영역을 수용하며, 이미지와 언어의 끊임없는 연동과 미끄러짐의 과정에서 의미의 지평을 확장하고 수렴한다. 빛에 의해 반사된 대상의 표면적 형상은 그에 대한 언어적 기술과 같이 사진에 선명하게 포착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김유자의 작업은 이러한 외양의 선명함을 의도된 모호함ambiguity 속에 위치시킨다. 그의 작업은 표층의 사실에 귀속되지 않고, 사진 매체로 포착한 이미지를 마치 문장 속의 한 단어처럼 문맥 아래 끊임없이 변화, 갱신, 확장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말한다. 사진의 평면성에는 우리를 다른 감각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힘이 있다고. 한 장의 압축된 이미지를 통해 그가 만들어 낼 문장, 그리고 그다음의 서사가 궁금해지는 지점이다.